창경궁 관람 후기
소개
1. 창경궁 연표
1483년 (성종 14) 창경궁 창건
1592년 (선조 25) 임진왜란으로 소실
1616년 (광해 8) 창경궁 중건
1909년 (순종 2) 일제 강점기 동물원과 식물원 조성으로 궁궐 훼손
1911년 창경원으로 격하
1983년 창경궁으로 환원 및 복원 공사
2. 건설 배경
본래 창경궁 터에는 1418년에 세운 수강궁이 있었습니다. 수강궁은 세종 때 상왕 태종을 위해 창덕궁 동편에 창건한 궁이었습니다. 1483년에 성종이 3명의 대비를 위해 이 터에 크게 궁궐을 다시 짓고, 창경궁이라 불렀습니다.
창경궁은 창덕궁과 사실상 하나의 궁궐을 이루어 이 둘을 합쳐서 동궐이라고 합니다. 창덕궁 후원의 정원도 공동으로 이용했다고 합니다. 창경궁은 창덕궁의 부족한 생활공간을 보충하여 왕과 왕비뿐 아니라 후궁, 공주, 궁인의 처소고 사용되었습니다.
3. 외형적 특징
경복궁처럼 일정한 원칙을 따라 경영된 궁궐과 달리 창경궁은 건축 형식과 제도 면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세워지고 이용된 궁궐입니다. 궁궐은 남향이 원칙이지만 창경궁의 중심 부분은 특이하게 동향으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동쪽에 왕실 동산인 함춘원과 낙산이 자리를 잡고 있어 그곳을 바라볼 수 있도록 창경궁의 정문, 으뜸 전각인 정전, 왕대비, 왕비, 세자빈이 거처하는 침전이 모두 동향으로 배치되었다고 전해집니다. 관청건물과 내전의 주요 전각들은 모두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창경궁은 자연 지형을 따르면서도 생활이 편의를 추구하여 궁궐을 조성했기 때문에 아름다움과 친근함을 두루 갖춘 궁궐입니다. 경복궁처럼 평지에 일직선의 축을 이룬 것이 아니라 창덕궁처럼 높고 낮은 지세를 거스르지 않고 언덕과 평지를 따라가며 필요한 전각을 지었습니다.
4. 희로애락
임진왜란 (1592년) 때 서울의 다른 궁궐과 함께 불에 탔다가 1616년에 재건되었습니다. 이때 다시 세운 명정전, 명정문, 홍화문 등은 창경궁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궁궐 건물들에 속합니다.
창경궁의 전성기는 1830년대입니다. 동궐도에는 여러 대비궁, 후궁과 공주들의 처소, 궐내각사 등이 촘촘하게 들어서고 곳곳에 정원 시설이 조화를 이룬 당시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왕실 가족의 생활공간으로 발전해 온 궁궐이기에 내전이 외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넓은 것이 창경궁의 특색입니다. 창경궁에는 왕들의 지극한 효심과 사랑, 왕과 세자의 애증, 왕비와 후궁의 갈등 등 왕실 가족 사이에 일어난 이야기가 풍부하게 전해져 내려옵니다.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해 지은 자경전이 언덕에 자리를 잡고 있고 세간에 널리 알려진 장희빈과 인현왕후, 영조와 사도세자의 이야기도 사건이 일어난 현장인 창경궁에서 들으면 더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일제 강점기에 창경궁 안의 건물들을 대부분 헐어내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설치하여 시민 공원으로 바꾸고 이름마저 창경원으로 격하시켰습니다. 또한 종묘와 연결된 땅의 맥을 끊고 그사이에 도로를 개설하여 궁궐의 품격을 훼손하였습니다.
1983년부터 동물원을 이전하고 본래의 궁궐 모습을 되살리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비록 아직 많은 유적을 복원하지 못했지만 아름다운 자연과 어우러진 창경궁의 모습에서 왕실 생활의 체취를 느낄 수 있습니다.
5. 건축물
창덕궁과 함께 동궐로 불렸던 창경궁은 서쪽으로 창덕궁과 맞닿아 있고 남쪽으로는 낮은 언덕을 지나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종묘와 이어져 본래 한 영역을 이루고 있었던 조선 시대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장소입니다.
성종의 효심으로 탄생한 창경궁은 왕실의 웃어른을 편안히 모시기 위한 궁궐로 지었기 때문에 정치 공간인 외전보다는 생활공간인 내전이 더 넓게 발달했습니다. 왕실 여성의 친숙한 공간인 내전에서 구중궁궐의 삶을 희로애락으로 기억합니다.
1. 홍화문
창경궁의 중심 부분이 동향이기 때문에 정문인 홍화문도 동쪽으로 세워져 있습니다. 홍화문은 창경궁의 정문으로 조화를 넓힌다는 뜻입니다. 홍화문 앞에 있는 왕실 언덕인 함춘원에 활터를 세워 무과 시험을 치르던 장소이며 국왕이 백성들을 친히 만났던 장소이기도 합니다. 홍화문 앞에서 영조는 균역법에 대한 찬반을 백성에게 직접 물었고 효심 깊은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기념하여 백성에게 손수 쌀을 나누어 주며 기쁨을 함께했던 곳입니다. 규모는 3칸 대문이지만 좌우에 한 쌍의 십자각을 세워 궐이라는 품격 높은 대문 형식을 갖추고 있습니다.
2. 옥천교와 외행각
모든 궁궐 마당에는 시냇물이 흐릅니다. 궁궐의 안쪽과 외부의 공간을 구분하는 역할을 하며 궁궐 뒤의 산과 짝을 이루어 좋은 운을 불러들이는 길지가 되라고 궁궐 앞쪽에 일부러 낸 물길을 금천이라고 부릅니다. 대문 안쪽에 명당 수인 금천을 흐르게 하고 그 위에 구슬과 같은 맑은 물이 흘러간다는 의미를 가진 옥천교가 있으며 금천과 옥천교를 함께한 상징적인 마당을 만들었습니다. 맑은 물 흐르듯 바른 정치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있는 듯합니다. 옥천교는 궁궐에 남아있는 다리 중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보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옥천교 주변은 봄 풍광이 매우 화사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금천과 옥천교가 있는 마당을 둘러싼 외행각은 궁궐을 지키는 관원들이 사용했습니다.
3. 명정전
명정전은 창경궁의 으뜸 전각인 정전입니다. 명정이란 정사를 밝힌다는 의미입니다. 국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과거시험, 궁중 연회 등의 공식적 행사를 치렀던 장소입니다. 인종이 1544년 (중종 39)에 즉위했던 장소이며 1759년 (영조 35) 6월 66세의 영조가 15세의 정순왕후를 맞이하는 혼례가 치러진 장소이기도 합니다. 임진왜란 후 광해군이 창경궁을 중건할 때 지은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정치를 위해 지은 궁궐이 아니라 왕대비 등의 생활공간으로 지은 궁궐이라 단층 지붕에 아담한 규모이지만 궁궐의 정전 가운데에서는 가장 오래된 건물입니다.
4. 문정전
문정전은 왕이 일상 업무를 보았던 집무실로 문정이란 문교로써 정치를 편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창경궁의 외전이 전체적으로 동향인 것과 달리 문정전은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문정전은 왕실 가족의 신주를 모신 혼전으로 쓰인 일도 있었고 영조의 첫째 왕비인 정성왕후와 철종의 비인 철인왕후의 혼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곳은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라고 명하고 서인으로 폐한 곳이기도 합니다. 그 후 뒤주는 홍화문 남쪽에 있는 선인문 안뜰로 옮겨졌고 사도세자는 8일 동안 굶주림과 더위에 신음하다가 숨을 거두었습니다.
5. 숭문당과 함인정
숭문당과 함인정은 명정전의 후전에 해당하는 건물입니다. 숭문당은 임금이 신하들과 경연을 열어 정사와 학문을 토론하던 곳입니다. 특히 영조는 이곳에서 성균관 유생이나 종친들을 접견하고 유생들을 시험했다고 전해집니다. 영조 임금의 친필 현판이 현재까지 남아있습니다. 함인정은 국왕이 신하들을 만나고 경연을 하는 곳으로 이용하였으며 영조가 문무 과거에 급제한 신하들을 접견하던 곳으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세상이 임금의 어짊과 의로움에 흠뻑 젖는다는 건물 이름의 뜻을 상징하듯 건물 사방이 벽체 없이 시원하게 터진 개방형 건물입니다.
6. 경춘전
경춘전은 침전 건물로 주로 왕대비, 왕비 또는 세자빈 등이 거처했던 곳입니다. 이곳에서 22대 정조와 24대 헌종이 태어났고 성종의 생모 소혜왕후, 즉, 인수대비 한씨와 숙종비 인현왕후 민씨, 정조의 생모 헌경왕후, 즉 혜경궁 홍씨 등이 승하하였습니다. 사도세자는 정조를 낳기 전에 용이 이곳 경춘전에 들어오는 꿈을 꾸고 경춘전 동쪽 벽에 용 그림을 그려두었습니다. 정조는 본인의 탄생을 기념해 경춘전 내부에 탄생 전이라 쓴 현판을 걸었으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7. 통명전과 양화당
통명전은 내전의 중심 공간으로 규모가 큽니다. 넓은 테라스와 같이 월대 위에 기단을 조성하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렸습니다. 지붕 가운데 용마루가 없고 가운데 세 칸은 대청마루를 두고 양옆에 온돌방을 두어 왕과 왕비의 침실로 썼습니다. 서쪽 마당에는 돌난간을 두른 네모난 연지와 둥근 샘이 있으며 뒤뜰에는 꽃 계단이 마련되어 있어 주변 경관이 매우 아름답습니다. 연회나 의례를 열 수 있는 넓은 마당에는 얇고 넓적한 박석을 깔았습니다. 통명전은 희빈 장씨의 인현왕후 저주사건이 있었던 곳이기도 합니다. 1694년 (숙종 20) 갑술환국으로 인현왕후가 복위되자 희빈으로 강등된 장씨는 인현왕후를 저주하며 처소인 취선당에 신당을 차리고 통명전 일대에 흉물을 묻어 숙종 비 인현왕후를 저주하였다가 사약을 받은 이야기로 유명한 곳입니다. 대비의 침전인 양화당은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피난했던 인조 임금이 돌아와 거처하기도 한 곳입니다. 소나무가 어우러진 건축물 주변의 풍경이 지금도 아름답습니다.
8. 영춘헌과 집복헌
이 일대는 생활공간이 밀집된 영역이었습니다. 남향으로 지어진 집복헌은 후궁의 생활공간이었습니다. 현재 집복헌은 영춘헌의 서쪽에 5칸으로 연결되어 있어 마치 영춘헌의 서쪽 행각처럼 붙어 있으나 원래는 두 집으로 분리되어 있었습니다. 사도세자와 순조가 집복헌에서 탄생했습니다. 특히 집복헌은 순조의 탄생, 돌잔치, 관례, 책례 등이 모두 이루어져 순조와 그 인연이 매우 깊은 장소이기도 합니다. 집복헌은 현재 옛 선조들의 일상품을 볼 수 있도록 각 방에 전시물을 배치해 놓았으며 유리창을 통해 박물관처럼 감상할 수 있도록 꾸며 놓았습니다. 정조는 즉위 후 자주 영춘헌에서 독서를 즐겼으며 이곳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정조는 영춘헌을 독서실 겸 집무실로 이용했다고 전해집니다. 이 건물의 동쪽에 궁녀들의 생활공간으로 추정되는 건물들이 많았으나 지금은 빈터입니다.
관람정보
매주 월요일 휴궁
09:00~21:00 (입장은 관람 시간 1시간 전까지만 가능)
창경궁과 창덕궁 연계 관람
창덕궁 연계 관람 시 창경궁 경내에 있는 함양문에서 매표하시면 됩니다. 매표시간은 계절별로 상이합니다. 2월~5월, 9월~10월은 09:00~17:00, 6월~8월은 09:00~17:30 11월~1월은 09:00~16:30까지입니다.
관람 요금
내국인은 만 25세 ~ 만 64세 1,000원, 외국인은 만 19세 ~ 만 64세 1,000원입니다. 무료 대상자는 만 24세 이하 (내국인), 만 18세 이하 (내국인), 만 65세 이상 (내국인, 외국인), 한복 착용자 (내국인, 외국인), 문화가 있는 날인 매월 마지막 수요일 (내국인, 외국인) 무료 관람입니다. 대상자는 반드시 관련 증빙 서류를 미리 준비하여 제시하여야 합니다. 종로구 주민은 50% 할인이며 4대궁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및 종묘를 모두 이용할 수 있는 통합관람권은 10,000원입니다.
해설 안내
해설을 원하는 단체(20인 이상 30인 이하)는 최소 이틀 전 전화 (02-762-4868) 예약을 하셔야 합니다. 출발장소는 옥천교 앞이며 언어권별로 창경궁 해설사에 의한 무료 안내입니다. 한국어 해설은 금, 토, 일에 자원봉사단체(우리 궁궐 지킴이, 궁궐 길라잡이)의 해설이 병행됩니다.
교통 안내
지하철 이용 시 4호선 혜화역 4번 출구로 나와 도보 13분이면 도착합니다. 자가용 이용 시 서울어린이과학관 맞은편 신호 앞에서 좌회전하시면 서울어린이과학관을 지나 바로 주차장을 찾으실 수 있습니다.
마무리
창경궁은 경복궁과 창덕궁에 이어 세 번째로 지어진 조선 시대 궁궐입니다. 조선 왕조는 건국 초기부터 경복궁을 법궁으로 창덕궁을 보조 궁궐로 사용하는 양 궐 체제를 이어왔습니다. 그러나 역대 왕들은 경복궁보다는 창덕궁에 거처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고 전해집니다.
왕실 가족이 늘어나면서 차츰 창덕궁의 생활공간도 비좁아졌다고 합니다. 이에 성종이 왕실의 웃어른인 세조 비 정희왕후, 예종 비 안순왕후, 덕종 비 소혜왕후 등 세 분의 대비가 편히 지낼 수 있도록 창덕궁 이웃에 마련한 궁궐이 창경궁입니다.
창경궁은 우리 역사에서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친 사건이 일어난 역사적 장소이자 역대 왕들의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왕실의 희로애락이 깃든 이야기를 풍부하게 전해주는 장소입니다. 창경궁이 전하는 역사, 인물, 건축, 자연의 이야기를 함께한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